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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야기

디오니소스에 숨겨진 비밀 [디오니소스 숭배사상]

by 핵심전략 2019. 10. 29.

디오니소스에 숨겨진 비밀을 아시나요?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 말고도 쾌락과 환락의 신입니다.

오늘은 그 이유와 디오니소스 숭배사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나에서 디오니소스 숭배사상이 퍼진 이유와 오랜 세월동안 근절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지 설명하기 위해선 디오니소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디오니소스의 탄생배경은 역시나, 제우스의 바람기로부터 시작된다. 제우스는 인간 세멜레를 사랑하게 되었고, 세멜레는 제우스의 아이를 갖는다. 하지만 이를 안 헤라는 유모로 변신하여 세멜레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세멜레로 하여금 제우스가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 전에 제우스가 맞는지 확인해보라고 한다. 스틱스강에 먼저 맹세를 한 후, 질문을 하라는 계략을 짠다.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본 모습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고, 스틱스 강에 맹세한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본모습을 보이고, 세멜레는 번개로 되어버린 제우스에 의해 타 죽는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꿰매 넣는다. 시간이 지나 허벅지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은 두 번(Dio) 태어난 자(nysos)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디오니소스 숭배사상이란 무엇일까? 디오니소스 숭배사상은 소위 디오니소스교로 불려진다. 이 디오니소스들의 신도들을 바카라고 불렀다. 바카들은 모일 때 마다 진탕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신들린 모습에서 내뿜는 광기와 공포와 두려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 바카들은 한 번 술에 취하면 횃불을 들고 산이나 숲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모든 동물들을 찢어 죽였다. 심지어 제물로 바쳐진 짐승 또는 어린아이를 산채로 뜯어 먹고 피를 마시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는 디오니소스의 신체를 먹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즉, 신과의 합일로 무한한 생명의 힘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 된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와의 합일이 무한한 생명의 힘을 받는 뜻을 가진 이유는 바로 디오니소스가 2번 태어났고 이는 그에게 삶과 죽음은 끝없는 생산의 과정일 뿐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디오니소스는 잘 알려진 대로 포도주와 올리브 등 농사 및 대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생명적인 요소들을 다루는 신이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바카들이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고대 크레타에서는 디오니소스와 아내 아리아드네를 기리기 위해 남성들이 여장을, 여성들이 남장을 하며 축제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디오니소스를 열렬하게 떠받치는 여성 광신도들이 남장을 하며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교가 사람들 마음속에 이토록 매력적으로 느껴져 광신도의 모습을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디오니소스는 굉장히 소탈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그 이유는 인간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농민을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포도 재배법을 알려주는 등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 또한, 버려져 비운의 여인으로 여겨지던 아리아드네를 측은히 여겨 결혼을 하는 모습 등이 소탈하고 서민적으로 비춰진 게 아닐까 싶다. 이 이미지란 것이 사람들 마음속에 포지셔닝 되는 순간, 그 인식은 변하기 힘들고 강력한 믿음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전파된 디오니소스교는 흘러 흘러, 고대그리스에 그리고 그 중심인 아테네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아테네에서 흥하게 되었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고대그리스 아테네는 척박한 지역이다. 농사를 짓거나 유목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포도나무와 올리브가 굉장히 중요한 자원이다. 그리고 이 포도나무와 올리브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요소이다. 그로인해 민간신앙으로서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둘째, 고대그리스의 에로티시즘 때문이다. 디오니소스교에서는 통음과 난무가 있었다. 평상시에 금기였던 이 행위를 위반 할 수 있었고, 술을 잔뜩 마시고 성과 폭력이 넘치는 황홀경의 절정을 맛 볼 수 있는 이곳은 현실을 벗어나 신의 세계를 엿보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셋째, 고대그리스 사회가 현세의 인간을 매혹하는 강력한 영향력으로 이성을 중시하면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게 되기 마련이고,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디오니소스교는 엄청난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넷째, 당시 종교는 국가적인 형태였으며 신비적인 요소는 없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교는 종교를 국가에서 분리하여 개인적인 인간을 만들려 하였고, 종교적 열광과도 같은 상태를 사람들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맛보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가진 디오니소스교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리스 문명은 디오니소스 신앙을 체제 내에 편입시켰다. 아폴론 신전 옆에 모시고, 2년에 한 번씩 축제를 벌이는 형태로 받아들여, 광기 역시 맹목적인 것이 아닌, 정상적인 노동으로 회귀하기 위한 잠깐의 질서 파괴(즉 스트레스 해소)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평민들에게 매우 높은 지지를 받게 된다. 아테네의 평민들은 노예가 아닌 그럭저럭 존중받는 신분이었기에 디오니소스의 위치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 후,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치는 축제인 대 뒤오뉘시아 제전은 그리스 최대의 희·비극 경연대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 뒤오니시아 제전에서 공연된 비극 중 하나인 박카이는, 테베의 왕 펜테우스가 민중 사이에서 크게 퍼졌던 디오니소스의 숭배를 독단적으로 금지하자 이에 반발한 신도들이 그를 갈가리 찢어 죽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신도 중에는 어머니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펜테우스의 행동이 '신에 대한 오만'으로 정당시되어 처벌됐다는 점에서 디오니소스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이것을 확립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 경 아테네에 출현한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먼저 디오니소스 신전을 건립하고 신전 근처에 원형 공간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 극장이 된 것이다. 극장이 완성되자 페이시스트리토스는 기원전 534년 첫 디오니소스 대제전을 개최하였다. 이후 이 제전행사는 매년 아테네에서 개최되게 되었다. 그런데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왜 이러한 농민들과 서민들의 행사였던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을 아테네에 들여왔던 것일까? 이것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당시 그리스의 참주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참주는 민중들의 지지를 업은 권력자이며 민중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평민들의 문화를 적극 장려하였는데 그러한 정책 중에 하나가 바로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의 도입이었던 것이다. 농민들과 평민들만의 의식이었던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을 아테네에 들여와 디오니소스 대제전을 확립하므로, 귀족 중심의 기존 문화를 평민 중심의 문화로 바꾸려는 혁신적인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노련한 정치인들이 신화적 사상을 의도적이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서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이라는 다소 무서운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비로소 디오니소스가 12신의 반열 가운데 포함된 것도 바로 이 참주정 시기라고 하니, 정치가들은 통치를 위해 종교까지 만들어 나갔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추가적으로 디오니소스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프레드리히 니체이다. 니체는 본인이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적 이란 용어를 비극적과 연결시킨 장본인이다. 니체에게 비극적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슬픔 같은 의미가 아니다. 비극적의 개념은 어원상 그리스어 tragikos에서 유래하며 이는 tragikostragohdia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tragos(산양) ohdah(노래) 합성어, 해석을 하자면 비극은 산양의 탈을 쓰고 술을 마시고 노래 불렀던 디오니소스 컬트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니체가 서양미술의 표현주의의 등장에 영향을 미친다. 니체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은 고통스러운 세계와 삶을 긍정하고 거기에 몰입하려는 충동이라고 표현하며, 숙명적 굴레에 한정을 가하지 않고 피하지 않는 모습이라 말한다. 또한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는 마치 술에 취한 디오니소스처럼 형태와 경계 없이 솟구치는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는 예술가라고 말하였다.

 

디오니소스가 니체에게 영향을 미치고, 니체는 표현주의의 등장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서양미술의 미학적이해를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종교적 등 다양한 요소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시 시대의 배경지식을 알고 보기 전과 후의 견해는 차이가 매우 크다.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감동과 그림에 대한 이해를 비약적으로 상승 시켜 주기 때문이다. 더욱 심도 깊은 이해를 위해 앞으로도 배우게 될 작품과 연관 지어 서양미술 뿐 아니라 ARTS에 대한 견해를 높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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